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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수(趙德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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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지(仁之)
생년1482(성종 13)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조세헌(趙世獻)

[상세내용]

조덕수(趙德壽)
1482년(성종 13)~미상.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인지(仁之)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증조부는 조후지(趙厚之)이고, 조부는 조익희(趙益禧)이며, 부친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조세헌(趙世獻)이다. 부인은 이덕제(李德濟)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528년(중종 23)에 식년시 진사 3등 57위로 합격하였고, 1534년(중종 29)에는 식년시 문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탁영시 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29)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 사관(史官)의 요직을 거쳤지만, 나세찬(羅世纘)과 송세형(宋世珩)의 대책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나세찬이 저술한 대책문이 김안로(金安老) 및 조정을 비판한 내용이 있다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사관으로서 조덕수가 초책(草冊)에 ‘김안로가 입론이 바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검열(檢閱) 나세찬이 지은 것이다’라고 직서(直書)하였다. 이에 주서(注書) 송세형이 ‘입론이 바르지 못하다’는 부분과 나세찬의 이름을 빼고 다시 초책에 적었다. 이를 두고 송세형이 김안로를 비판한 나세찬을 감싼 것이며, 또한 사관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인 ‘직필’을 하지 않았다는 논란이 있었다. 처음 초책을 작성한 조덕수가 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고, 직필하지 못하게 한 송세형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관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간원들이 체칙을 청하였다.

1539년(중종 34)에는 형조좌랑(刑曹佐郞)에서 파직되었고, 1541년(중종 36)에는 용안현감(龍安縣監)으로서 치적이 있다하여 품계를 올려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