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충보(尹忠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DA9BCF4U9999X0 |
이명(異名) | 한곡선생(鷳谷先生) |
호(號) | 여거사(驪居士) |
호(號) | 고려처사(高麗處事) |
호(號) | 한곡선생(鷳谷先生)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무송(茂松)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윤식(尹湜) |
[상세내용]
윤충보(尹忠輔)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여거사(驪居士)‧고려처사(高麗處事)이고, 다른 이름은 한곡선생(鷳谷先生)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주1)
이다.
부친은 학사(學士) 윤식(尹湜)이다.
1390년(공양왕 2)에 진사가 되었고,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였다.(주2)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여강(驪江: 현 여주)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래서 ‘고려처사(高麗處事)’라는 호로 불리었다.(주3)
태조가 이런 충절을 높이 사 ‘여거사(驪居士)’라는 호를 내렸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 고려의 수도 송도(松都: 현 개성)를 바라보며 하루 종일 절을 올렸다. 처음 은둔 생활을 시작할 때에 황새 무리가 주변에 모여 들었다하여 사람들이 그를 ‘한곡선생(鷳谷先生)’이라 불렀고, 또 그가 절하던 장소는 왕망현(王望峴)이라 칭해졌다.
임종하기 전비석을 세우지 말고 무덤을 고려의 풍습으로 할 것을 일렀다. 이택지(李擇之)와 이식(李植), 신광한(申光漢) 등의 여주(驪州) 인사들이 수차례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그의 신주를 모시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관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에 수록된 아들 윤자견의 문과 기록 참고. |
부친은 학사(學士) 윤식(尹湜)이다.
1390년(공양왕 2)에 진사가 되었고,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였다.(주2)
안성군수 |
태종실록 34권, 1417년 11월 3일 기사, "윤자견의 아비 전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 윤충보(尹忠輔)가 북을 쳐서 호소하기를,“노신(老臣)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자식이」 자자(刺字)되어 오점(汚點)이 후세에 미치는 것이 참으로 슬픕니다.”참고. |
고려처사 |
정조실록 20권, 1785년 8월 27일 기사 "전조(前朝)의 안성 군수(安城郡守) 윤충보(尹忠輔)는 길재(吉再).서견(徐甄)과 그 뜻이 같아 고려 처사(高麗處士)라 불렸습니다." 참고. |
은둔 생활을 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 고려의 수도 송도(松都: 현 개성)를 바라보며 하루 종일 절을 올렸다. 처음 은둔 생활을 시작할 때에 황새 무리가 주변에 모여 들었다하여 사람들이 그를 ‘한곡선생(鷳谷先生)’이라 불렀고, 또 그가 절하던 장소는 왕망현(王望峴)이라 칭해졌다.
임종하기 전비석을 세우지 말고 무덤을 고려의 풍습으로 할 것을 일렀다. 이택지(李擇之)와 이식(李植), 신광한(申光漢) 등의 여주(驪州) 인사들이 수차례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그의 신주를 모시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태종실록
정조실록
정조실록
[집필자]
도태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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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