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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충보(尹忠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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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한곡선생(鷳谷先生)
호(號)여거사(驪居士)
호(號)고려처사(高麗處事)
호(號)한곡선생(鷳谷先生)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무송(茂松)
활동분야문신
윤식(尹湜)

[상세내용]

윤충보(尹忠輔)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여거사(驪居士)‧고려처사(高麗處事)이고, 다른 이름은 한곡선생(鷳谷先生)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주1)
본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에 수록된 아들 윤자견의 문과 기록 참고.
이다.

부친은 학사(學士) 윤식(尹湜)이다.

1390년(공양왕 2)에 진사가 되었고,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였다.(주2)
안성군수
태종실록 34권, 1417년 11월 3일 기사, "윤자견의 아비 전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 윤충보(尹忠輔)가 북을 쳐서 호소하기를,“노신(老臣)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자식이」 자자(刺字)되어 오점(汚點)이 후세에 미치는 것이 참으로 슬픕니다.”참고.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여강(驪江: 현 여주)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래서 ‘고려처사(高麗處事)’라는 호로 불리었다.(주3)
고려처사
정조실록 20권, 1785년 8월 27일 기사 "전조(前朝)의 안성 군수(安城郡守) 윤충보(尹忠輔)는 길재(吉再).서견(徐甄)과 그 뜻이 같아 고려 처사(高麗處士)라 불렸습니다." 참고.
태조가 이런 충절을 높이 사 ‘여거사(驪居士)’라는 호를 내렸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 고려의 수도 송도(松都: 현 개성)를 바라보며 하루 종일 절을 올렸다. 처음 은둔 생활을 시작할 때에 황새 무리가 주변에 모여 들었다하여 사람들이 그를 ‘한곡선생(鷳谷先生)’이라 불렀고, 또 그가 절하던 장소는 왕망현(王望峴)이라 칭해졌다.

임종하기 전비석을 세우지 말고 무덤을 고려의 풍습으로 할 것을 일렀다. 이택지(李擇之)와 이식(李植), 신광한(申光漢) 등의 여주(驪州) 인사들이 수차례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그의 신주를 모시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태종실록
정조실록

[집필자]

도태수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