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검(白惟儉)
[관련정보]
[상세내용]
백유검(白惟儉)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무장.
1561년(명종 16) 10월 7일 부친의 대상(大祥)을 치르고 담제(禫祭)를 지내기도 전에 황해도(黃海道) 지역의 도적을 소탕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감당할 자가 없다며, 순검사(巡檢使)로 임용하였다. 그러나 3일 뒤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언충(李彦忠)이 차자를 올려 백유검(白惟儉)은 부친상을 당하여 담제도 지내지 않았으니 도적을 잡는 일에 종사시킬 수 없다며 효도를 다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11일에 삼사에서 상서를 올려 상례가 사람의 도리 중 가장 중한 것이라며 삼년상도 치르지 않고 도적을 잡으러 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백유검을 순검사로 임용하여 도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1562년(명종 17) 1월 순검사로 도적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제수되었으며, 그해 6월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용되었다. 1564년(명종 19) 1월에는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 제수되었으며, 6월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1561년(명종 16) 10월 7일 부친의 대상(大祥)을 치르고 담제(禫祭)를 지내기도 전에 황해도(黃海道) 지역의 도적을 소탕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감당할 자가 없다며, 순검사(巡檢使)로 임용하였다. 그러나 3일 뒤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언충(李彦忠)이 차자를 올려 백유검(白惟儉)은 부친상을 당하여 담제도 지내지 않았으니 도적을 잡는 일에 종사시킬 수 없다며 효도를 다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11일에 삼사에서 상서를 올려 상례가 사람의 도리 중 가장 중한 것이라며 삼년상도 치르지 않고 도적을 잡으러 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백유검을 순검사로 임용하여 도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1562년(명종 17) 1월 순검사로 도적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제수되었으며, 그해 6월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용되었다. 1564년(명종 19) 1월에는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 제수되었으며, 6월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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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