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침(柳世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138CE68D1511X0 |
자(字) | 자헌(子獻) |
생년 | ?(미상) |
졸년 | 1511(중종 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진주(晉州[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종윤(柳宗潤) |
조부 | 유해(柳諧) |
증조부 | 유진(柳瑱) |
처 | 유씨(兪氏) |
처부 | 유기창(兪起昌) |
외조부 | 민해(閔解)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유세침(柳世琛)
미상∼1511년(중종 6). 본관은 진주(晉州[土]). 자는 자헌(子獻).
증조부는 유진(柳瑱)이고, 조부는 유해(柳諧)이고, 부는 유종윤(柳宗潤)이다. 외조부는 민해(閔解)이고, 처부는 지중추부사 유기창(兪起昌)이다.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90년(성종 21)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대에는 정언, 지평 등을 지내며 왕에게 천변(天變)을 경계하여 정사를 공정히 할 것, 사학(四學)의 해이, 백성을 위한 역사(役事)의 중지와 기근으로 인한 백성의 구제, 국가 재정의 절약 등을 건의하다가 1504년에는 연산군에 의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남포(藍浦)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 때 대복권이 되어 사간원대사간에 오른 이후 승정원동부승지,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형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국정 전반에서 두루 활약하였다.
특히 대사간 시절에는 왕에게 10조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첫째 심술(心術)을 바르게 할 것, 둘째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셋째 명기(名器)를 아낄 것, 넷째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 다섯째 장오(贓汚)를 엄하게 할 것, 여섯째 포상(褒賞)을 중하게 할 것, 일곱째 형벌과 죄를 삼갈 것, 여덟째 부비(浮費)를 생략할 것, 아홉째 민은(民隱)을 구휼할 것, 열째 변장(邊將)을 선택할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1511년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는데, 아내 유씨(兪氏)가 부음을 듣고 애통하여 미음을 입에 넣지 않은 지 7일 만에 죽자, 나라에서 정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증조부는 유진(柳瑱)이고, 조부는 유해(柳諧)이고, 부는 유종윤(柳宗潤)이다. 외조부는 민해(閔解)이고, 처부는 지중추부사 유기창(兪起昌)이다.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90년(성종 21)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대에는 정언, 지평 등을 지내며 왕에게 천변(天變)을 경계하여 정사를 공정히 할 것, 사학(四學)의 해이, 백성을 위한 역사(役事)의 중지와 기근으로 인한 백성의 구제, 국가 재정의 절약 등을 건의하다가 1504년에는 연산군에 의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남포(藍浦)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 때 대복권이 되어 사간원대사간에 오른 이후 승정원동부승지,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형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국정 전반에서 두루 활약하였다.
특히 대사간 시절에는 왕에게 10조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첫째 심술(心術)을 바르게 할 것, 둘째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셋째 명기(名器)를 아낄 것, 넷째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 다섯째 장오(贓汚)를 엄하게 할 것, 여섯째 포상(褒賞)을 중하게 할 것, 일곱째 형벌과 죄를 삼갈 것, 여덟째 부비(浮費)를 생략할 것, 아홉째 민은(民隱)을 구휼할 것, 열째 변장(邊將)을 선택할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1511년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는데, 아내 유씨(兪氏)가 부음을 듣고 애통하여 미음을 입에 넣지 않은 지 7일 만에 죽자, 나라에서 정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國朝文科榜目
[집필자]
이승민
명 : "세침(世琛)"에 대한 용례
전거 | 용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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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臯觀外史v11 | 世琛字子獻晋州人官大憲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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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