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유녕(李幼寧)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720B155D1504X0
자(字)영지(寧之)
생년?(미상)
졸년1504(연산군 10)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이심원(李深源)

[상세내용]

이유녕(李幼寧)
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영지(寧之).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의 아들이다.

진사로 있다가 1496년(연산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재주와 학식으로 현직(顯職)에 등용되었다.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갑자사화 때 아버지와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바른 말로 간함으로써 참혹한 화를 입었다. 그의 아우 이유반(李幼槃)은 함께 죽었으며 작은아우 이유정(李幼靖)이유령의 아들 이돈복(李敦復)은 어린아이로서 종이 되는 등 온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이행(李荇)이 갑자년에 거제에 귀양가 있으면서 친구 중에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들을 생각하여 절운(絶韻) 10수를 짓고 각각 주석을 붙여 애도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부자 모두 충성과 절의를 가상히 여겨 관작을 추증받았고, 특히 아버지 이심원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