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우(李良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591C6B0D1417X0 |
시호(諡號) | 안소(安昭) |
생년 | ?(미상) |
졸년 | 1417(태종 17)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종친 |
부 | 이원계(李元桂) |
공신호 | 정사공신(定社功臣) |
[상세내용]
이양우(李良祐)
미상∼1417년(태종 17).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원계(李元桂)의 아들이며,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천우(天祐)의 아우이다.
1398년(태조 7)에 형 천우와 함께 세자 방석(芳碩)의 보필을 맡고 있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난을 꾸민다는 정보에 따라 방원(芳遠)‧방간(芳幹)을 도와 그들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영안군(寧安君)에 봉하여졌다.
1400년(정종 2) 방간의 난 때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으며, 그뒤에도 병을 핑계삼아 조정에 잘 나가지 않아 태종의 미움을 받아 양주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1408년(태종 8)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서 왜적들에게 잡혀갔던 백성들을 구하여 왔다.
1412년 5월 태조의 직계가 아니면서 재내제군(在內諸君)의 호를 받은 자를 혁파할 때 공신인 까닭에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뒤 1414년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일이 탄로나서 방간과의 사통죄(私通罪)로 다시 대간(臺諫)의 격렬한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대간이 외방에 부처(付處)되는 소동을 벌였다.
시호는 안소(安昭)이다.
1398년(태조 7)에 형 천우와 함께 세자 방석(芳碩)의 보필을 맡고 있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난을 꾸민다는 정보에 따라 방원(芳遠)‧방간(芳幹)을 도와 그들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영안군(寧安君)에 봉하여졌다.
1400년(정종 2) 방간의 난 때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으며, 그뒤에도 병을 핑계삼아 조정에 잘 나가지 않아 태종의 미움을 받아 양주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1408년(태종 8)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서 왜적들에게 잡혀갔던 백성들을 구하여 왔다.
1412년 5월 태조의 직계가 아니면서 재내제군(在內諸君)의 호를 받은 자를 혁파할 때 공신인 까닭에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뒤 1414년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일이 탄로나서 방간과의 사통죄(私通罪)로 다시 대간(臺諫)의 격렬한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대간이 외방에 부처(付處)되는 소동을 벌였다.
시호는 안소(安昭)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대표명 | 이양우(李良祐) |
명 | 양우(良佑), 양우(良祐) |
봉호 | 완원군양우(完原君良祐),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
성명 | 이양우(李良祐) |
시호 | 안소(安昭) |
명 : "양우(良佑)"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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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