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의(宋好義)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A1D638C758D1514X0 |
자(字) | 의지(宜之) |
생년 | ?(미상) |
졸년 | 1514(중종 9)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여산(礪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송자강(宋自剛) |
조부 | 송철산(宋鐵山) |
외조부 | 조근(趙瑾) |
[관련정보]
[상세내용]
송호의(宋好義)
미상∼1514년(중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의지(宜之).
송철산(宋鐵山)의 손자이며, 송자강(宋自剛)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부윤 조근(趙瑾)의 딸이다.
1507년(중종 2)에 교수로서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 이듬해에 정언을 거쳐 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이극돈(李克墩)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대신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였으나 오직 그 혼자만이 추탈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었다.
또, 군수 정침(鄭沉)이라는 자가 자기 집을 짓는 데 궁궐을 본떳다가 그에게 탄핵, 훼철당하기도 하였다. 죄를 미워함이 이와 같았다. 이처럼 믿음이 강하고 정의로웠으며, 어떤 일을 맡으면 확실하게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그의 친구들 모두가 당대의 명류(名流)들이었으며, 그가 죽자 거마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송철산(宋鐵山)의 손자이며, 송자강(宋自剛)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부윤 조근(趙瑾)의 딸이다.
1507년(중종 2)에 교수로서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 이듬해에 정언을 거쳐 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이극돈(李克墩)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대신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였으나 오직 그 혼자만이 추탈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었다.
또, 군수 정침(鄭沉)이라는 자가 자기 집을 짓는 데 궁궐을 본떳다가 그에게 탄핵, 훼철당하기도 하였다. 죄를 미워함이 이와 같았다. 이처럼 믿음이 강하고 정의로웠으며, 어떤 일을 맡으면 확실하게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그의 친구들 모두가 당대의 명류(名流)들이었으며, 그가 죽자 거마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장필기(張弼基)
명 : "호의(好義)"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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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