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언(權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D8CC5B8FFFFD1467X0 |
시호(諡號) | 양정(襄靖) |
생년 | ?(미상) |
졸년 | 1467(세조 1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안동(安東)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공신호 | 정난공신 |
[상세내용]
권언(權躽)
미상∼1467년(세조 13). 조선시대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무동(武童)’이란 별칭을 받았다. 약관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를 모으자 그 휘하에 들어가서 심복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워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1455년 단종복위운동인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그 당여들을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영풍군(永豊君) 이천(李瑔: 세종의 아들)의 저택과 하위지(河緯地)의 처와 여식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1461년에 명나라 황태후가 죽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예로써 이름을 떨쳤으나, 입신을 위하여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무동(武童)’이란 별칭을 받았다. 약관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를 모으자 그 휘하에 들어가서 심복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워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1455년 단종복위운동인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그 당여들을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영풍군(永豊君) 이천(李瑔: 세종의 아들)의 저택과 하위지(河緯地)의 처와 여식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1461년에 명나라 황태후가 죽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예로써 이름을 떨쳤으나, 입신을 위하여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世祖實錄
[이미지]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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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