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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林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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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순(子順)
호(號)백호(白湖)
호(號)풍강(楓江)
호(號)소치(嘯癡)
호(號)겸재(謙齋)
호(號)벽산(碧山)
생년1549(명종 4)
졸년1587(선조 20)
시대조선전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문학 > 시‧시조인
임진(林晉)
저서『수성지(愁城誌)』
저서『화사(花史)』
저서『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상세내용]

임제(林悌)
1549년(명종 4)∼1587년(선조 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임진(林晉)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찼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그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 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이나,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 지기(知己)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白湖集
林悌의 初期詩에 대하여(심호택, 백강서수생박사화갑기념논총 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1)
林悌論(蘇在英,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80)

[집필자]

고경식(高敬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