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양사언(楊士彦)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591C0ACC5B8B1517X0
자(字)응빙(應聘)
호(號)봉래(蓬萊)
호(號)완구(完邱)
호(號)창해(滄海)
호(號)해객(海客)
생년1517(중종 12)
졸년1584(선조 17)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학 > 문인
양희수(楊希洙)
저서『봉래집(蓬萊集)』

[상세내용]

양사언(楊士彦)
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주부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고,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하였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許橿)이 지은 「서호별곡(西湖別曲)」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楊士彦의 南征歌(金東旭, 延世大學校論文集 9집―人文科學―, 1963)
蓬萊遺墨(국어국문학 58∼60호, 1972.)

[이미지]

[집필자]

장순하(張諄河)

자 : "응빙(應聘)"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乘總v5白面都尉敢招黃髮先生耶義門內邀其經過先生曰白面都尉敢招黃髮先生耶終不入楊蓬萊○安邊府使楊士彦卒士彦字應聘號蓬萊生而秀明神精遐擧見者不知其非世上人八典名邑不贏一錢嘗曰吾四知金自謂楊震後後不可忝吾祖安邊時忽鑿
葵史v2應聘號蓬萊明廟登弟官府使風骨不俗筆法奇古載箕雅
小華龜鑑v9○楊士彥字應聘號蓬萊明宗科官府使朴思菴龍波亭要士彥書額揭之一夕江風捲入波中爲龍宮取去云士彥在襄陽書一飛字屬其子曰吾
靑野만集v6楊士彥字應聘號蓬萊明廟丙午文科官至府使公善作大字嘗在襄陽別業寫一飛字屬其子曰吾之精力盡在於此爾其護惜乃藏于密室一
靑彙抄v3楊士彦 字應聘 號蓬萊明廟 丙午文科官至府使公善作大字嘗在襄陽別業寫一飛字屬其子曰吾之精力盡在於此爾其護惜乃藏于密
寒臯觀外史v29蓬萊名士彥字應聘清州人官府使先大夫名曄字太輝 號草堂官副學○蓬萊國島詩曰金屋樓䑓拂紫烟濯龍雲路下羣仙青山亦厭人間世飛
寒臯觀外史v35文正從祀文廟栗谷李先生名珥字叔献官吏判謚文成從祀文廟重峰趙先生名憲字汝式白川人官提督謚文烈○楊士彦字應聘清州人官府使○靜菴漢陽人宗谷徳水人
寒臯觀外史v39長士彥字應聘号蓬莱官府使次士俊字應舉号楓皐官僉正次士奇号竹齋一号青溪字應過官府使清州人
國朝人物志v2應聘號蓬萊淸州人獻納順達從孫能文善書世稱仙風道骨庚子生員丙午文科官至府使國朝榜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