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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인(申命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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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영중(榮仲)
호(號)송정(松亭)
호(號)풍류광객(風流狂客)
시호(諡號)정청(貞淸)
생년1492(성종 23)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학 > 문인

[상세내용]

신명인(申命仁)
1492년(성종 23)∼미상.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영중(榮仲), 호는 구봉(龜峰)송정(松亭)풍류광객(風流狂客).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며,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약수(李若水)박광우(朴光祐) 등과 함께 성균관유생 등 1,000여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집결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하였고, 대궐에 돌입하였다.

그 다음해에 거창으로 피신하여 갔던 그의 스승 김식이 자결하자 그 시신을 충주로 모셔와 장사지냈고, 그를 애도하는 「조송옥사(弔宋玉辭)」를 지었다. 이후 사환(仕宦)을 단념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한 무고를 두려워하여 과장(科場)에는 들어갔으나 술만 마시고 나왔다고 한다. 항상 윤수(尹壽)목세칭(目世秤) 등과 함께 시문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고, 만년에는 최수성(崔壽城) 등과 함께 풍속교정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탁월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정광필(鄭光弼)안당(安塘)이장곤(李長坤)김정(金淨)조광조김식기준(奇遵) 등과 함께 8현(八賢)이라 불렀다고 한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청(貞淸)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己卯錄補遺
己卯遺蹟
海東雜錄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