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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李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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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종지(淙之)
호(號)마재(磨齋)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488(성종 19)
졸년1544(중종 39)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서(李曙)

[상세내용]

이총(李灇)
1488년(성종 19)∼1544년(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세조의 아들인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의 아들이다.

승헌대부(承憲大夫) 숭선부정(嵩善副正)에 봉하여졌다. 조광조(趙光祖)와는 도의(道義)로서 교제하였고 일찍부터 정주학에 심취하여 「정주봉사(程朱封事)」를 인출(印出)하여 다스림에 허물이 없도록 임금에게 바쳐 왕으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다.

또, 왕에게 표문을 올려 정치의 잘못을 극론하고 김정(金淨)박상(朴詳) 등의 방면과 여악(女樂)을 혁파할 것 등을 주청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일파인 좌당(坐黨)에 붙어 정치에 관여하였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20년 김덕순(金德純)의 장인이었던 그는 덕순의 소재에 대하여 심문을 받아 매를 맞고 영해로 유배되어 15년이나 있다가 개령(開寧)으로 옮겨졌다.

1534년에 풀려나 1538년에 겨우 복직되었다. 그의 순수하고 바른 학문과 충효의 절의는 당시 유림들간에 널리 알려져 추앙받고 있었다.

이이(李珥)가 쓴 묘지에 보면 조광조와는 서로 존경하는 벗이었으며, 천성과 자질이 청수하고 아름다웠고 기량이 숙성하였으며, 마음을 바른 학문에 두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을 다하며 창졸간에 당하더라도 말이 변함없었다. 평생 큰 뜻은 오직 충효를 지키는 데 있었고 스스로 검소하여 한미한 선비처럼 행세하였다.

육예(六藝)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음악과 산수에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숙종 때 와서 바른 학문과 충효가 이미 유현(儒賢)의 정론(正論)하는 바가 있고, 또 조광조와 함께 사화에 화를 입었던 것으로 시호와 봉군(封君)이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人物考
大東野乘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