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鄭浣)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644FFFFB1473X0 |
자(字) | 신지(新之) |
호(號) | 겸재(謙齋) |
생년 | 1473(성종 4) |
졸년 | 1521(중종 1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진(鄭秦) |
증조부 | 정연(鄭淵) |
외조부 | 윤우(尹遇)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완(鄭浣)
1473년(성종 4)∼1521년(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신지(新之), 호는 겸재(謙齋).
병조판서 정연(鄭淵)의 증손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 정진(鄭秦)의 아들이며, 모친은 배천군수 윤우(尹遇)의 딸이다.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산사에서 학문을 닦다가 1504년(연산군 10) 참봉으로 갑자사화를 입어 영천으로 유배되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514년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18년 학행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등용되고, 이어서 공조‧호조의 정랑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 예조‧이조의 정랑을 지내다가 이해 기묘사화로 현풍에 부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신의가 높고 언론이 정대하였으며, 마음과 처사가 탄이(坦易), 관유(寬裕)하고, 이해와 시비를 가리는 데 촛불처럼 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시귀(蓍龜)로 일컬었다.
병조판서 정연(鄭淵)의 증손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 정진(鄭秦)의 아들이며, 모친은 배천군수 윤우(尹遇)의 딸이다.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산사에서 학문을 닦다가 1504년(연산군 10) 참봉으로 갑자사화를 입어 영천으로 유배되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514년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18년 학행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등용되고, 이어서 공조‧호조의 정랑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 예조‧이조의 정랑을 지내다가 이해 기묘사화로 현풍에 부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신의가 높고 언론이 정대하였으며, 마음과 처사가 탄이(坦易), 관유(寬裕)하고, 이해와 시비를 가리는 데 촛불처럼 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시귀(蓍龜)로 일컬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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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