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윤수(金允壽)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724C218B1387X0
시호(諡號)호양(胡襄)
생년1387(우왕 13)
졸년1462(세조 8)
시대조선전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무신 > 무신
공신호원종공신(原從功臣)

[상세내용]

김윤수(金允壽)
1387년(우왕 13)∼1462년(세조 8).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선산(善山).

세종초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력(經歷)을 역임하고, 1427년(세종 9) 세자시종관이 되었다.

1435년에 여연군수가 되어 야인 2천7백여기가 성을 포위하자 도진무(都鎭撫) 이진(李震) 등과 잘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그해 5월 여연 경내에 침입한 야인이 인마(人馬)를 약탈, 도주한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로 논란되었으나, 훌륭한 장수이며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자주 교체할 수 없다 하여 무사하였다.

1436년 야인 5백여기가 조명우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우마(牛馬) 85두를 약탈당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으나, 곧 기용되어 김종서(金宗瑞) 휘하에서 경원종성 등지의 축성역(築城役)을 책임맡았다.

1438년에는 회령의 방어를 책임맡고 이듬해 길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42년 회령절제사, 이듬해 경원절제사를 거쳐 144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이어서 경상우도안무처치사(慶尙右道安撫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1447년 함길도도절제사가 된 뒤에 1450년(문종 즉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어 북변(北邊)의 방어를 책임맡았다.

1451년 경기조전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로 마보병(馬步兵) 3천 4백여명을 거느리고 개성부에 주둔하였으며, 이어서 경상우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하정 겸 사은사(賀正兼謝恩使)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충청도처치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