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유(鞠襦)
[상세내용]
국유(鞠襦)
생졸년 미상. 고려 후기 무신‧충신. 호는 복애(伏崖)이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부친은 병부상서(兵部尙書) 국량(鞠樑)이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장군의 탐라 정벌을 돕고, 곡주 지역의 반란군을 평정하는 등의 공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 관직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불러냈으나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태조가 살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두문불출하고 집과 함께 불타 죽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음으로 절개(節槪)를 세웠으며, 꺾이지 않는 의리(義理)도 세웠다. 이러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수록되었으며,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에 포함되었다. 슬하에 3남 국무(鞠珷)‧국성(鞠珹)‧국황(鞠瑝)을 두었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충절을 기려 자손을 담양 관리에 임명토록 하였다.
1932년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담양 증암사(甑巖祠), 고산 반곡사(泮谷祠), 장성 경현사(景賢詞), 담양 구산사(龜山祠), 파주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부친은 병부상서(兵部尙書) 국량(鞠樑)이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장군의 탐라 정벌을 돕고, 곡주 지역의 반란군을 평정하는 등의 공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 관직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불러냈으나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태조가 살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두문불출하고 집과 함께 불타 죽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음으로 절개(節槪)를 세웠으며, 꺾이지 않는 의리(義理)도 세웠다. 이러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수록되었으며,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에 포함되었다. 슬하에 3남 국무(鞠珷)‧국성(鞠珹)‧국황(鞠瑝)을 두었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충절을 기려 자손을 담양 관리에 임명토록 하였다.
1932년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담양 증암사(甑巖祠), 고산 반곡사(泮谷祠), 장성 경현사(景賢詞), 담양 구산사(龜山祠), 파주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騎牛先生文集
全羅道 邑誌
騎牛先生文集
全羅道 邑誌
[집필자]
김정자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