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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집성(大集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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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태집성(太集成)
생년?(미상)
졸년1236(고종 23)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대집성(大集成)
미상∼1236년(고종 23). 다른 이름은 태집성(太集成).

고려 고종낭장(郞將)을 지내고 1228년(고종 15) 대장군(大將軍)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무인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최충헌(崔忠獻)이 무사(武士)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낭장 대집성 등 5명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임명하였는데, 대집성은 수하에 기본 부대(本領)가 없다고 해서 중이든 노예든 불문하고 자기 부대의 군사로 삼으면서 서울 안팎을 크게 소란하게 하여 집집이 문을 닫고 외출을 못하였으며 심지어는 산에 나무하러 가지도 못하였다. 이 소문을 최충헌이 듣고 노하여 그 직을 박탈하였다.

1229년(고려 고종 16)에는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서 금‧은‧비단 등으로 장식한 매우 사치스러운 어연(御輦)을 만들어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이 이에 매우 감탄하자, 최우는 연 제조를 감독한 대집성에게 안마 의복‧흥정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의 1차 침입 때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春明)은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게 포위된 성을 지키면서, 고려몽고가 화의(和議)를 맺은 후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몽고 살리타이의 요구로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이 성 안으로 들어가 최춘명에게 “국조(國朝)와 삼군(三軍)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고 하였지만, 최춘명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군사를 시켜 활을 쏘게 하여 대집성은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고 한다.

1231년(고려 고종 19) 몽고 침입 때 건의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게 하였고, 후에 수 사공(守司空)에 올랐다.

[참고문헌]

高麗史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이승민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