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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벽(趙仁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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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양렬(襄烈)
생년?(미상)
졸년1393(태조 2)
시대고려후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무신 > 무신
조돈(趙暾)
증조부조휘(趙暉)
정화공주(貞和公主)
처부환조(桓祖)
공신호수복경성(收復京城) 2등공신

[상세내용]

조인벽(趙仁璧)
미상∼1393년(태조 2).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한양(漢陽).

쌍성총관 조휘(趙暉)의 증손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돈(趙暾)의 아들이다. 대대로 용진(龍津: 덕원)에 살았다.

1356년(공민왕 5)쌍성 회복시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그 공으로 호군이 되었다.

1363년에는 김용(金鏞)의 토벌에 공을 세웠고,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372년에는 가주(家州)에서 난동자들이 지방관리를 죽이는 일이 있자 판사(判事)로서 이들을 토벌하였다. 이해에 만호가 되어 함주북청에서 복병으로 왜구를 대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밀직부사로서 충혜왕의 아들을 자칭한 중 석기(釋器)를 잡는 데 공을 세우고 다시 동북면원수로 출정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1377년에는 신주옹진문화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공격하였으나 적세가 완강하여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판밀직(判密直)으로 화포를 사용하여 수군을 훈련시켰으며, 1379년에는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 이듬해에는 강릉도상원수(江陵道上元帥)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훈을 세웠다.

1383년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도체찰사가 되고, 1385년에는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가, 그리고 곧이어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된 뒤 수차 유폐된 우왕을 찾아 의대(衣帶)와 향연을 베푸는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환조(桓祖)의 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혼인하였던 까닭에 조선왕조 개국 후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집필자]

임영정(林英正)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