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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桓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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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자춘(子春)
성명이자춘(李子春)
생년1315(충숙왕 2)
졸년1360(공민왕 9)
시대고려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추존왕
도조(度祖)
처부최한기(崔閑奇)
외조부박광(朴光)
묘소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

[상세내용]

환조(桓祖)
1315년(충숙왕 2)∼1360년(공민왕 9). 조선 태조의 아버지.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과 자는 자춘(子春).

도조(度祖: 椿)의 아들이며, 모친은 알동백호(斡東百戶) 박광(朴光)의 딸이다. 부인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1394년(태조 3) 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환왕(桓王), 태종 때 다시 환조로 추존하였다. 조카 교주(咬住)가 장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형의 천호(千戶) 관직을 습직하였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독자적인 체제를 굳혔다.

그는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조씨(趙氏: 이복동생의 外家)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습직하였으나, 그뒤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이른바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 하여 중서성(中書省)요양성(遼陽省)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간하여 호적을 작성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원주민을 우대하고 이주자를 쇄환(刷還)하려는 저의를 가진 것이었다. 이는 이주민을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대륙에서 원명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동북면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 기씨세력(奇氏勢力)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그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대로 구축하여온 세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1355년(공민왕 4) 그가 공민왕을 찾아 내부(來附)할 뜻을 비치자, 공민왕은 그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하여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조씨세력을 제거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에 돌아가면 그곳의 토착기반을 이용하여 배반할 것임을 들어 조신들이 반대하였으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하여 다시 영흥으로 돌아왔다. 그뒤 동북면에 돌아온 지 4년 만에 병사함으로써 당초 조신들의 염려는 기우로 끝났다.

죽은 뒤 그의 아들 이성계통의대부(通議大夫)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 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어 약관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선조의 기반인 상만호의 두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이성계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牧隱集
太祖實錄
龍飛御天歌
璿源系譜
高麗末 李成桂의 세력기반(許興植, 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4)
李朝の四祖の傳說と其の構成(池內宏, 東洋學報 5―2‧3, 1913)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