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익(鄭天益)
[상세내용]
정천익(鄭天益)
생졸년 미상. 고려말 공민왕 때의 관료. 본관은 진양(晉陽)(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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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년(공민왕 11) 승보시(升補試)에 합격하여 생원 자격을 얻었으나 관직으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사위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의 노력 끝에 재배법을 터득하여 종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 씨를 뽑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모르던 차 때마침 집에 머물게 된 호승(胡僧) 홍원(弘願)에게 물어 이를 고안하여 목화를 직조의 원료로 쓰는 법을 열어놓았다.
문익점과 함께 목화를 처음 심어 번식시킨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본관 |
진양정씨 은열공파보를 참고하여 본관을 진양(晉陽)으로 수정함. 태조실록 14권, 1398년 6월 13일 기사 "(문익점)이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를 보면 정천익은 진주에 살던 정씨였음. |
1362년(공민왕 11) 승보시(升補試)에 합격하여 생원 자격을 얻었으나 관직으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사위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의 노력 끝에 재배법을 터득하여 종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 씨를 뽑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모르던 차 때마침 집에 머물게 된 호승(胡僧) 홍원(弘願)에게 물어 이를 고안하여 목화를 직조의 원료로 쓰는 법을 열어놓았다.
문익점과 함께 목화를 처음 심어 번식시킨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燃藜室記述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燃藜室記述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집필자]
박성래(朴星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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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2-04-12 | 朝鮮王朝實錄과 진양정씨 은열공파보를 참고하여 "일설에는 아들 문래(文來)가 제사법(製絲法)을 고안하였고, 손자 문영(文英)이 면포 짜는 법을 알아냈다고도 전한다."를 삭제함.[수정자: 이재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