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鄭庇)
[상세내용]
정비(鄭庇)
미상∼1375년(우왕 1). 고려의 무신. 본관은 공산(公山)(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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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년(공민왕 22) 밀직부사로서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그 일행과 함께 명나라에 말을 바치러 가는 도중 정료성(定遼城)에 이르렀는데, 수문관(守門官)이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일행은 되돌아오고 말았다.
1374년 밀직부사로서 판사 우인열(禹仁烈)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육로를 통하여 조공할 것과 방물(方物)을 본래대로 할 것을 청하고, 명제(明帝)의 수조(手詔)와 중서성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어 지문하사(知門下事)로서 남경에 말을 바치고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양광도안무사(楊廣道安撫使)로서 왜구를 잘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본관 |
성씨와 본관 "공산정씨"편을 참고하여 본관을 공산(公山)으로 추가함. |
1373년(공민왕 22) 밀직부사로서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그 일행과 함께 명나라에 말을 바치러 가는 도중 정료성(定遼城)에 이르렀는데, 수문관(守門官)이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일행은 되돌아오고 말았다.
1374년 밀직부사로서 판사 우인열(禹仁烈)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육로를 통하여 조공할 것과 방물(方物)을 본래대로 할 것을 청하고, 명제(明帝)의 수조(手詔)와 중서성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어 지문하사(知門下事)로서 남경에 말을 바치고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양광도안무사(楊廣道安撫使)로서 왜구를 잘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황운룡(黃雲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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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