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간(李凌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2A5AC04D1357X0 |
생년 | ?(미상) |
졸년 | 1357(공민왕 6)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영천(寧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출신지 | 남원 |
[상세내용]
이능간(李凌幹)
미상∼1357년(공민왕 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寧川). 영천이씨(寧川李氏)의 시조로 알려지는 인물로, 남원 출신이다.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때 함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치부하였으나 홀로 청고한 생활을 하였으며, 또 충선왕이 토번(吐蕃)에 귀양을 가게 되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쳐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밀직부사로 충선왕의 자궁(梓宮)을 모시고 귀국하였고, 그 이듬해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제(元帝)에게 주청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28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을 때 원에 가서 문종의 즉위와 개원(開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어 사신으로 원에 다녀왔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정승에 올랐다. 그 이듬해 정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에 조적(曺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에 책록되고 철권(鐵拳)을 하사받았다.
1348년(충목왕 4)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또 영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영도첨의사(左政丞領都僉議事)에 올랐으며,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충선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일찍이 왕의 총희(寵姬)를 백문거(白文擧)와 함께 한 사람씩 물려받았으나 별실에 두고 한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의롭게 여겼다 한다.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때 함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치부하였으나 홀로 청고한 생활을 하였으며, 또 충선왕이 토번(吐蕃)에 귀양을 가게 되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쳐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밀직부사로 충선왕의 자궁(梓宮)을 모시고 귀국하였고, 그 이듬해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제(元帝)에게 주청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28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을 때 원에 가서 문종의 즉위와 개원(開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어 사신으로 원에 다녀왔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정승에 올랐다. 그 이듬해 정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에 조적(曺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에 책록되고 철권(鐵拳)을 하사받았다.
1348년(충목왕 4)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또 영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영도첨의사(左政丞領都僉議事)에 올랐으며,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충선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일찍이 왕의 총희(寵姬)를 백문거(白文擧)와 함께 한 사람씩 물려받았으나 별실에 두고 한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의롭게 여겼다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손홍렬(孫弘烈)
대표명 | 이능간(李凌幹) |
명 | 능간(凌幹) |
봉호 |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 |
성명 | 이능간(李凌幹) |
명 : "능간(凌幹)"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8-09 | 영천이씨의 시조임을 참고하여 본관을 영천(寧川)으로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