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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익(廉承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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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유직(惟直)
시호(諡號)충정(忠靖)
생년?(미상)
졸년1302(충렬왕 28)
시대고려후기
본관파주(坡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

[상세내용]

염승익(廉承益)
미상∼1302년(충렬왕 28).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주(坡州). 초명은 유직(惟直). 정당문학(政堂文學) 신약(信若)의 후손이다.

일찍이 악질(惡疾)을 얻어 부처와 신에게 빌어서 나은 뒤에는 병든 사람을 위해 빌어 고치기를 일삼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278년(충렬왕 4)에 박항(朴恒)김주정(金周鼎)이지저 등과 함께 이때 처음 설치된 필도지(必闍赤)가 되었다.

1281년 자기 집의 일부를 희사하여 대경사경소(大經寫經所)로 삼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승지로서 권세를 부려 기인(其人)을 사역하여 큰 저택을 지었으므로 비난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1284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1278년에 공주의 명을 받고 순군(巡軍)과 홀지(忽赤) 등을 풀어 인가를 수색하여 양가의 딸을 징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1287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뒤이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으며, 1291년에 판판도사사세자보(判判圖司事世子保)가 되었다가 뒤이어 판감찰사(判監察事)가 되었다.

1293년에 왕과 공주를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95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302년에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뒤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가사를 입고 숯불을 손바닥 위에 놓고 향을 피우며 염불하였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