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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신우(方臣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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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소공(小公)
생년?(미상)
졸년1343(충혜왕 후4)
시대고려후기
본관상주(尙州)
활동분야관료 > 환관
방득세(方得世)
처부이광시(李光時)
공신호추성돈신량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

[상세내용]

방신우(方臣祐)
미상∼1343년(충혜왕 복위 4). 고려의 환관(宦官).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소공(小公). 방득세(方得世)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 궁중에 급사(給事)하다가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장알승(掌謁丞)을 거쳐 천부대경(泉府大卿)이 되었다.

뒤에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장작원사(將作院使)가 되고 다시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었다. 충선왕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충렬왕원나라에 무고하자, 수원황태후에게 홍중희의 무고임을 밝혀 도리어 그를 조주(潮州)에 귀양가게 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수원황태후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되어 금자장경(金字藏經)을 쓰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이때 승속(僧俗) 300인으로써 민천사(旻天寺)에서 완성하여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기고 수원황태후의 복을 빌었으며, 당국으로 하여금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또 이때 충선왕으로부터 중모군(中牟君)에 봉하여졌으며, 개성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그뒤 태정황후(泰定皇后)를 섬기어 또한 총애를 받아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다시 휘정원사(徽政院使)가 되었다가 저경사사(儲慶司使)가 되었다.

때마침 원나라가 삭방(朔方)의 번왕(藩王) 팔로미사(八驢迷思)가 이끄는 무리를 압록강 동쪽에 이주시키려 하자 “고려는 땅이 좁고 산이 많아 농사와 목축할 곳이 없으니 북쪽 사람들이 편안히 살만한 곳이 못 되며, 한갓 동민(東民: 高麗民)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라고 원제(元帝)에 고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또 일찍이 고려원나라의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수원황태후에게 고하여 그 논의를 중지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충숙왕으로부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추성돈신량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이 되었다.

1330년(충숙왕 17)에 귀국하여 선흥사(禪興寺)를 중수하고 1342년 원나라에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원나라의 7조(朝)와 두 태후를 섬겨 국가 기무에 참여하였으며, 강남(江南)의 토지 4천묘(畝)를 하사받는 등 부의 축적도 많았다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