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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리(閔中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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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관료 > 관인

[상세내용]

민중리(閔中理)
생졸년 미상. 고려 말기의 관인(官人).

1378년(우왕 4) 4월 우왕이 “개성이 왜구 침입의 염려가 있고 지리의 쇠왕(衰旺)을 들어 도선서(道詵書)를 상고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라.”고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장보지(張補之)에게 명하였다.

이때 민중리전(前)총랑으로서 도선의 밀기(密記)에 실린 북소(北蘇) 기달산(箕達山), 즉 협계(峽溪)가 천도할만하다 하였다. 이에 북소조성도감(北蘇造成都監)이 설치되어 공역이 시작되었으나 협계는 골짜기에 편재되어 조운(漕運)이 통하지 않는다는 조정의 여론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1389년(공양왕 1) 3월 “진주(晉州)로부터 아버지의 상을 듣고 돌아가면서 생선과 짐승의 고기를 싣고 갔고, 판도판서(版圖判書: 戶曹判書)가 되어서는 기복(起復)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무를 보아 녹(祿)을 받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나각순(羅恪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