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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충(元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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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왕주(王鑄)
자(字)정보(正甫)
생년1290(충렬왕 16)
졸년1337(충숙왕 후6)
시대고려후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관료 > 총신
원부(元傅)
조부원관(元瓘)
공신호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

[상세내용]

원충(元忠)
1290년(충렬왕 16)∼1337년(충숙왕 복위 6). 고려 충숙왕의 행신(倖臣).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정보(正甫). 찬성사를 지낸 원관(元瓘)의 손자이며, 중찬(中贊)을 지낸 원부(元傅)의 아들이다.

8세에 음보(蔭補)로 동북면도감판관이 되었다.

18세에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에 있으면서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왕씨(王氏)를 받고 이름을 주(鑄)로 바꾸었다.

벼슬이 누전(累轉)하여 우사윤(右司尹)이 되었으나 왕은 대언(代言)을 맡게 하려 하였다. 이것을 사양한 데 대하여 왕은 노하여 사여(賜與)한 성명을 깎고 지철주사(知鐵州事)로 좌천하였다.

그뒤 왕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자, 압록강에서 왕을 맞이하여 전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뒤 대언이 되고 밀직부사를 거쳐 평리(評理)가 되었다.

1321년(충숙왕 8)에서 5년간 충숙왕원나라에 있을 때 줄곧 왕을 시종하였다. 이에 앞서 상왕으로서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충선왕은 1320년, 자기를 신임하던 원나라인종(仁宗)이 죽자 원나라의 간신배의 모함으로 토번에 유배되었다가 진종(晉宗)이 즉위한 1323년에야 소환된 일이 있다.

한편, 1321년 4월 원나라에 간 충숙왕은 이듬해 심왕(潘王) 고(暠)의 참언으로 영종(英宗)에 의하여 힐책을 받고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게까지 되었다.

심왕충숙왕을 퇴위시키고 고려 국왕이 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1322년에는 권한공(權漢功) 등이 백관을 모아 심왕의 국왕취임을 위하여 원나라중서성에 글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영종이 피살되고 진종이 즉위하자 충숙왕은 국왕인을 되돌려받고,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에 충숙왕을 섬긴 공으로 찬성사가 되고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의 호를 받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집필자]

박창희(朴菖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