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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金台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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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불기(不器)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261(원종 2)
졸년1330(충숙왕 17)
시대고려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수(金須)

[상세내용]

김태현(金台鉉)
1261년(원종 2)∼1330년(충숙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불기(不器).

태조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운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으로, 부친은 원종어사를 지낸 김수(金須)이고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김주정(金周鼎)의 조카이다.

10세 때에 아버지 김수가 삼별초난의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힘써 1275년(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 이인성(李仁成)을 시관으로 한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이어 전시(殿試)에도 합격하여 좌우위참군 직문한서(左右衛參軍直文翰署)를 제수받고, 좌창별감 판응방사(左倉別監判鷹坊事)가 되었다.

얼마 뒤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고, 우승지를 거쳐 밀직부사로 승진하면서 성절사(聖節使)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3년에는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비서윤(祕書尹) 김우(金祐)와 함께 박리(朴理) 등 33인을 진사로 선발하였다. 충렬왕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받았고,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난국을 수습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양광수길도계점사(楊廣水吉道計點使) 행수주목사(行水州牧使)가 되어 모범적으로 도내의 민호를 점검하였다.

그뒤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로서 파직되어 한거하다가, 1321년(충숙왕 8)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복직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원나라에 의하여 충선왕토번(吐蕃)으로 귀양가고 충숙왕원나라에 억류되었으나, 그의 노력으로 국사가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충숙왕원나라의 억류에서 풀려나 관제를 개편할 때 파직되었다가, 이어 참의정승(參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330년에 충혜왕의 청원으로 원나라가 국왕의 인(印)을 빼앗고 그로 하여금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과 반대당의 무리들이 그를 불러 성인(省印: 당시 고려국왕이 겸직하는 征東行中書省左丞相의 印)을 거두어가고 그와 윤석(尹碩)원충(元忠) 등을 하옥시켰다. 그는 곧 옥에서 풀려났으나 이 일로 인해 가족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고려내의 이러한 변화를 전해 들은 충혜왕이 사람을 보내어 다시 성인을 회수하게 하고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게 하였으나, 곧 죽고 말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언동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온화하였고, 어머니를 모심에는 효를 극진히 하였다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문을 모아 『동국문감(東國文鑑)』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김재명(金載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