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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누백(崔婁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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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중기
본관수원(水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상저(崔尙翥)

[상세내용]

최누백(崔婁伯)
생졸년 미상. 고려의 문신‧효자. 본관은 수원(水原). 수원의 향리(鄕吏)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한 다음,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시묘중인 어느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가 시종이 없다 이를쏘냐.”라는 시를 읊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였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였다.

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 生員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으며, 뒤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輿地勝覽
三綱行實圖

[집필자]

손홍렬(孫弘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