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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공(扶餘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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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부여수(扶餘燧)
생년?(미상)
졸년1112(예종 7)
시대고려중기
본관개성(開城)
활동분야왕실 > 왕족
적경궁주(積慶宮主)

[상세내용]

부여공(扶餘公)
미상∼1112년(예종 7). 고려의 왕족.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수(燧)이다. 문종의 아들로 순종선종숙종의 아우이다.

1080년(문종 34)에 개부의동삼사 검교사공 수상서령 상주국 부여후 식읍 일천호(開府儀同三司檢校司空守尙書令上柱國扶餘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고, 1086년(선종 3)에 수사도 식읍 이천호(守司徒食邑二千戶)가 더해졌다.

1094년(헌종 즉위)에는 수태보(守太保)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095년(숙종 즉위)에는 숙종이 즉위하여 수태부 식읍 삼천호 식실봉 삼백호(守太傅食邑三千戶食實封三百戶)를 제수하였다.

1099년에는 죄로써 경산부 약목군(若木郡)에 유배되니 왕이 유교와 불교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1112년에는 다시 거제현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일찍이 1086년에 이모제(異母弟)인 적경궁주(積慶宮主: 문종의 딸로 仁敬賢妃의 소생)와 혼인하게 되었는데, 이때 형제간인 금관후(金官侯) 이(詈)변한후(卞韓侯) 막(邈)진한후(辰韓侯) 유(愉) 등이 동성간의 혼인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당시 국왕인 선종이 듣지 아니하여 혼인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회에 유교적인 예법이 점차 침투되어 들어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귀족들에게 대하여서는 이미 1058년(문종 12)에 대공친(大功親) 사이의 소생에게 벼슬길을 막은 것과 관련시켜 볼 때, 당시 왕실에 있어서는 보수성이 매우 강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高麗史

[집필자]

황운룡(黃雲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