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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거(金隱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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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775(혜공왕 11)
시대통일신라
활동분야정치 > 정치인

[상세내용]

김은거(金隱居)
미상∼775년(혜공왕 11). 신라 혜공왕 때의 정치인‧반란자.

『삼국사기』에 의하면, “767년(혜공왕 3) 7월에 이찬 김은거당나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인하여 책명(冊命)을 가해줄 것을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 신라전에는 “767년(大曆 2)에 헌영(憲英: 경덕왕)이 죽자 국인(國人)이 그 아들 건운(乾運: 혜공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인하여 대신 김은거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입조하여 방물을 바치고 책명을 가해주기를 청했다.”고 되어 있고,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766년에는 헌영이 죽자 아들 건운이 즉위하였다.

김은거를 보내어 당나라에 와서 대명(待命)하게 하였다.”고 한 서로 상이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같은 일이나, 미리 가서 대명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혜공왕은 8세 때 즉위하여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하였다. 어떤 의미로는 혜공왕의 즉위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왕과 모후를 당나라에서 봉책한 것은 768년의 일이다. 그해 7월에 30여일 계속된 대공(大恭)의 난(亂)이 일어났다. 그해 10월에 이찬 신유(神猷)상대등이 되고, 그는 시중이 되었다. 어린 왕의 보호역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770년에 대아찬 김융(金融)의 반란이 진압된 뒤, 그해 12월에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시중이 되고, 774년 9월에 상대등 신유가 퇴직한 바 없이 이찬 양상(良相: 선덕왕)이 상대등이 되고 있다.

그리고 775년 3월에는 시중 정문이 물러감이 없이 이찬 김순(金順)이 시중이 되고 있다. 그해 6월에 드디어 이찬으로 있던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고, 또 8월에는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 정문과 모반하였다가 복주되었다.

777년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극론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김주원(金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혜공왕대의 이와같은 인사난맥은 조정중신들의 계속된 반란과 함께 그 정치사정이 극도로 불안했음을 말해준다.

『속일본기』에는 그를 숙위왕자(宿衛王子)라고 하고, 그가 돌아오는 편에 일본대사의 소식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는 왕자로 당나라에 숙위가서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혜공왕을 도와 국정을 바로잡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혜공왕의 어지러운 정사가 그로 하여금 반란으로까지 몰고가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舊唐書
新唐書
續日本紀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