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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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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송계(松溪)
생년680(문무왕 20)
졸년756(경덕왕 15)
시대통일신라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상세내용]

무상(無相)
680년(문무왕 20)∼756년(경덕왕 15). 신라 때의 승려. 성은 김씨(金氏), 호는 송계(松溪).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신라 국왕의 셋째아들이라고 하였으나, 부왕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성덕왕군남사(郡南寺)에서 중이 되었으며, 728년(성덕왕 27)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현종(玄宗)은 그를 선정사(禪定寺)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번잡한 서울을 피하여 옛 촉나라 땅인 자중(資中)으로 가서 지선(智詵)의 밑에서 선(禪)을 배웠다.

그뒤 40년 동안 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수도한 이승(異僧) 처적(處寂)을 찾아가서 선과 두타행(頭陀行)을 익혔는데, 처적은 그에게 무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측천무후로부터 하사받은 마납구조의(磨納九條衣)를 물려주었다.

그는 한번 좌선을 시작하면 5일 동안 계속하였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도 바위에 앉아 수도하였고 밤중에도 자리를 이탈하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 언제인가 두마리의 맹수가 다가오자 개울물로 몸을 씻은 뒤 옷을 벗고 맹수 앞에 누워 잡아먹기를 기다렸으나, 맹수는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냄새만 맡은 뒤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그뒤 가까운 도성으로 옮겨 낮에는 무덤가에서, 밤에는 나무 밑에 앉아 고행정진하였는데, 그를 존경한 많은 사람들이 묘원의 한쪽에 정사(精舍)를 지어주고 머무르게 하였다. 명성이 높아지자 당나라 황실에서 청하려 하였고, 이를 시기한 현령 양익(楊翌)은 그의 도력을 시기하여 20여명의 무뢰한을 시켜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현령의 청 안으로 모래와 자갈, 큰 돌들을 동반한 바람이 몰아치면서 장막 등이 뒤집혀졌다. 양익이 뉘우치고 사죄하자 바람이 멈추었는데, 이때부터 양익은 그를 도와 정중사(淨衆寺)‧대자사(大慈寺)‧보리사(菩提寺)‧영국사(寧國寺) 등을 짓도록 주선하였다.

그뒤 무상은 정중사에 머무르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절에는 나무를 하는 일꾼이 있었는데, 하루는 “손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니 옆에 있겠다.”고 하였다. 무상은 본국 신라로부터 자객이 와서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좌선하고 있었는데, 그날밤 천장으로부터 큰 물체가 떨어지더니 자객이 일꾼의 칼에 맞고 죽었다. 일꾼은 죽은 자객의 시체를 산문 밖 구덩이에 묻은 뒤 어디론지 사라졌다.

또한, 무상은 절 앞마당의 큰 떡갈나무를 가리키면서 제자들에게 멀지 않아 이 나무와 탑이 변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841년 무종이 폐불(癈佛)을 단행하였는데 절은 무사하였으나 나무와 탑은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상은 절 앞에 있는 2개의 연못을 가리켜 왼쪽의 것은 국이요 오른쪽의 것은 밥이라고 하였다. 시주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 이 연못물을 푸게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 왔다고 한다.

그는 정중사에서 77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뒤 무종은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그때 정중사의 대종(大鐘)을 강건너 대자사로 옮겼고, 선종 때는 다시 정중사로 옮겨왔다. 이를 옮기기 위해서는 이틀이 걸려야 하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순식간에 이전할 수 있었다.

종을 옮기는 일을 주관하였던 승려가 무상의 사리탑(舍利塔)을 참배하러 갔더니 그 탑에 많은 땀이 배어 있었다. 사람들은 백년 전에 죽은 무상이 도와서 종을 쉽게 운반하게 된 것임을 깨닫고 더욱 존경하였다.

후인들은 이 사리탑을 동해대사탑(東海大師塔)이라고 불렀다. 그는 28년을 중국에 머무르면서 도력을 떨쳤으며, 우리나라 승려 중 최초로 중국에서 선을 배워 중국인을 교화한 고승이다.

[참고문헌]

宋高僧傳
神僧傳
宗敎史話(李箕永, 韓國佛敎硏究院, 1978)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