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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봉규(王逢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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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활동분야기타 > 지방세력가

[상세내용]

왕봉규(王逢規)
생졸년 미상. 신라 말기의 호족.

처음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 泉州縣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宜寧)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는데, 뒤에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지역도 석권하였다. 그의 활동 중에서는 특히 중국과의 교섭사실이 유명하다.

924년(경명왕 8)에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를 자칭하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으며, 927년에는 후당으로부터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에서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봉해졌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는 등 대중국관계가 자못 활발하였다.

신라 말기에 지방세력으로서 대외적 교섭을 독자적으로 벌인 예는 청해진(淸海鎭)장보고(張保皐)를 비롯하여 궁예(弓裔)견훤(甄萱) 등과 같은 대세력들이 있었지만,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지방호족들의 일부로서 대중국교섭을 독자적으로 행한 대표적인 사람은 왕봉규였다.

이와같은 대중국교섭은 문물의 교류를 통한 이득의 추구라는 점과 함께, 중국왕조로부터의 승인을 받았다는 외교적 성과를 이용하여 자신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일개 지방호족세력의 대중국통교는 신라 말기의 중앙집권력의 붕괴라는 정치정세의 측면과 함께 통일기 이후 활발해진 신라인들의 해상활동능력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927년 이후의 왕봉규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강주지역이 곧 이어 견훤의 지배하에 들어가 후백제 멸망 때까지 그 영역이 되었던 사실로 미루어볼 때 왕봉규의 세력도 견훤에 의해서 소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羅末群雄의 對中通交―特히 王逢規를 中心으로―(金庠基,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1974)

[집필자]

노태돈(盧泰敦)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