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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信忠){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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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활동분야관료 > 대신

[상세내용]

신충(信忠)
생졸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대신.

『삼국유사』에 의하면 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신충과 더불어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뒷날 그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등급에 넣지 않자, 그는 「원가(怨歌)」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고 한다.

이 향가(鄕歌)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왕은 그에게 작록(爵祿)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신충은 739년(효성왕 3)에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가 되어 효성왕을 보좌했으며, 그 다음 경덕왕대에도 총신(寵臣)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는 757년(경덕왕 16)에 사임한 김사인(金思仁)의 뒤를 이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763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런데 그가 상대등에 오른 757년은 경덕왕의 전제주의적인 개혁정치가 단행된 해로서, 이른바 9주를 비롯한 지방군현의 명칭을 모두 한식(漢式)으로 고쳤으며,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명칭도 모두 한식으로 고쳤다.

이러한 한화정책(漢化政策)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중국제도를 모방하여 전제정치를 강화하려는 데 그 참뜻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처럼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상대등직에 재임하면서 왕의 개혁정치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763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섰을 뿐 아니라, 지리산 기슭 단속사(斷俗寺)에 숨어들어가 거주했다고 하는데, 이는 경덕왕대의 한화정책에 반대하던 귀족의 압력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지은 「원가」는 만년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단속사는 763년에 신충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기 이전인 748년(경덕왕 7)에 이미 이순(李純)에 의해 세워져 있었다. 이순의 정치적 입장 역시 신충과 같아서 단속사의 창건은 기울어져가는 전제정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진골 귀족의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순경덕왕에 대한 실망과 연정이 서로 얽혀서 단속사를 경영하게 하였다. 신충이 단속사에 들어간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원가」는 한때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그가 단속사에 은거하여 실의의 만년을 보내면서 세태의 변화를 원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增訂 古歌硏究(梁柱東, 一潮閣, 1960)
景德王과 斷俗寺‧怨歌(李基白, 韓國思想 5, 1962;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