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타천(冬陁川)
[상세내용]
동타천(冬陁川)
생졸년 미상. 신라 태종무열왕 때 북한산성의 성주.
661년(태종무열왕 8)에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 장군 생계(生偕)가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옮겨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북한산성의 성주였던 대사(大舍) 동타천은 마름쇠를 성밖에 던져놓아 적의 군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적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성벽을 안양사(安養寺) 창고를 헐어 그 목재로 수리하고, 또한 우마피(牛馬皮)와 천을 걸어 매어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방어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남녀 2,800인만이 있었는데, 동타천은 이들을 격려하여 20여일을 견디었다.
그러나 양식이 다하고 힘이 피로하여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동타천이 지성껏 하늘에 빌었더니 홀연히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뇌우가 진동하매 적이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은 동타천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661년(태종무열왕 8)에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 장군 생계(生偕)가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옮겨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북한산성의 성주였던 대사(大舍) 동타천은 마름쇠를 성밖에 던져놓아 적의 군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적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성벽을 안양사(安養寺) 창고를 헐어 그 목재로 수리하고, 또한 우마피(牛馬皮)와 천을 걸어 매어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방어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남녀 2,800인만이 있었는데, 동타천은 이들을 격려하여 20여일을 견디었다.
그러나 양식이 다하고 힘이 피로하여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동타천이 지성껏 하늘에 빌었더니 홀연히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뇌우가 진동하매 적이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은 동타천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韓國史―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1971)
韓國史―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1971)
[집필자]
유인춘(柳寅春)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