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관창(官昌)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AD00CC3DFFFFB0645X0
이명(異名)관장(官狀)
생년645(선덕여왕 14)
졸년660(무열왕 7)
시대신라
활동분야기타 > 기타
품일(品日)

[상세내용]

관창(官昌)
645년(선덕여왕 14)∼660년(무열왕 7).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일명 관장(官狀).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660년에 왕에게 천거되었다. 신라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고자 출병할 때, 좌장군인 아버지 밑에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황산(黃山, 또는 連山)벌에서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의 결사대는 용맹하기가 더할 바 없었으며,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신라군에 대항하였으므로 처음 네 차례의 전투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지고 힘이 다할 뿐이었다. 신라백제 양국의 운명을 건 황산벌싸움에서의 전세가 불리함을 보자, 아버지가 불러 이 싸움에서 공과 명예를 세울 것을 독려하였다.

이에 앞서 신라 장군 흠춘(欽春)의 아들 반굴(盤屈)도 그 아버지의 명을 받고 적진에 나아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곧 적진에 달려들어가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으나, 계백은 그의 어리고 또 용맹함에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적장을 죽이고 적기(敵旗)를 빼앗지 못하였음을 분하게 여겨,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또 적군에 사로잡혔다. 계백도 이번에는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용감한 죽음에 자극된 신라군은 분연히 진격하여 계백을 죽이고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백제를 평정할 수 있었다. 무열왕은 그 전공을 높이 기려 급찬(級飡)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주었다.

용맹과 충절은 후대인들에게 칭송되어, 고려 말기에는 경주 지방에서 관창의 가면검무(假面劍舞)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나이어린 소년으로 하여금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가 전사하게 한 것은 후세에 교훈이 될만한 것이 못 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충효정신과 화랑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官昌―黃土벌에 진 花郞―(丁原鈺, 歷代人物韓國史 1, 信和出版社, 1979)

[집필자]

신동하(申東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