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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慈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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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선종랑(金善宗郞)
생년590(진평왕 12)
졸년658(태종무열왕 5)
시대신라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김무림(金茂林)
저서『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저서『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저서『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저서『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저서『관행법(觀行法)』

[상세내용]

자장(慈藏)
590년(진평왕 12)경∼658년(태종무열왕 5)경.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이다.
1. 가계와 출가
무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2. 입당수도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뒤 그 산골로부터 나오자 각처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다투어 계를 받았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4구게(四句偈)를 주었다. 그 게송이 범어였으므로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한 승려가 금점(金點)이 있는 가사(袈裟)한 벌과 부처의 바루 한 벌, 그리고 불두골(佛頭骨)한 조각을 가지고 와서, “일체의 법은 모두가 자성(自性)이 있는 바 없다. 법성(法性)을 이렇게 요달할지면 곧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보게 되리라.”고 4구게를 번역해준 다음 가사 등을 주었다.

또, 신라의 동북방 명주(溟州)경계에 있는 오대산은 일만의 문수(文殊)가 항상 거주하는 곳이므로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라고 하였다.

그뒤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뒤 태종에게 글을 올려 승광별원을 떠나 장안의 남쪽 50리쯤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다가 다시 장안으로 가서 태종으로부터 비단 200필을 받는 등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3. 귀국 후의 활동
643년선덕여왕당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 만에 귀국하였다.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하였다.

645년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세우고 그 절의 제2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그가 왕에게 9층탑 건립을 건의한 것은 당시의 어려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호국정신과 삼국통일의 염원에서였다.

불력(佛力)에 의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신앙심만이 아니라, 신라서울 경주에 거대한 탑을 세움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한 현실적인 필요성 또한 깊이 작용하였다.

649년(진덕여왕 3)에는 국가의 복식을 중국의 제도와 같게 하기를 권하여 실행을 보았으며, 그 이듬해에는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하였다.
4. 사상과 업적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국의 모든 승니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또한, 한달에 두번씩 계를 설하게 하고, 순검사(巡檢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지방의 사찰을 일일이 살피고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며 불경과 불상 등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는 법도를 확립시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승문(僧門)에 들 것을 자청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출가승려가 될 것을 원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을 입문시키기 위하여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그곳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았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 대표적인 한 사례는 오대산신라적 설정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오대산문수보살의 상주도량(常住道場)으로서 중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오대산신라에도 있으며, 문수진신(文殊眞身)과 5만의 여러 불‧보살이 머무르고 있다는 신앙을 신라에 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신라 10성(聖)의 1인으로 추대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金堂)에 모셔졌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서는 현재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그의 깊은 학문적 업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승려 양충(良忠)『법사찬사기(法事讚私記)』 중에 자장『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에서 따서 옮긴 구절이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唐高僧傳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