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봉상왕(烽上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D09C0C1C655D0300X0
이명(異名)치갈왕(雉葛王)
이명(異名)상부(相夫)
이명(異名)삽시루(歃矢婁)
생년?(미상)
졸년300(봉상왕 9)
시대고구려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봉상왕(烽上王)
미상∼300년(봉상왕 9). 고구려 제14대왕. 재위 292∼300년. 일명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歃矢婁)라 하였다.

서천왕의 아들로 태어나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다. 왕위에 오르자 곧 왕권의 강화에 주력, 숙신(肅愼)을 격파하여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던 숙부 달가(達賈)를 죽였고, 293년(봉상왕 2)에는 동생 돌고(咄固)를 죽였으며, 피신하고 있던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뒤의 美川王)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는 등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계속된 흉년에도 불구하고 298년과 300년에 궁실을 대규모로 증축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다링강(大凌河) 하류 방면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해가던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의 모용외(慕容廆)와 충돌하였다.

293년과 296년 모용외군의 침략을 받았는데, 293년에는 신성태수(新城太守)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의 활약으로 이들을 격퇴하였고, 296년에는 침략군이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다가 무덤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스스로 물러갔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들은 당시 모용외의 세력이 아직 요하(遼河)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사실성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300년에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왕이 궁실을 수리하려고 백성을 징발하려 하자, 당시의 국상(國相)창조리(倉助利)는 그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왕을 폐위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은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고 두 아들과 더불어 자살하였고 봉산원(烽山原)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晉書
高句麗國相考 上(盧重國, 韓國學報 16, 一志社, 1979)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대표명봉상왕(烽上王)
상부(相夫)
왕명봉상왕(烽上王), 치갈왕(雉葛王)

왕명 : "봉상왕(烽上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3烽上王名相夫西川王太子晉惠帝元康二年壬子立庚申爲倉助利所廢尋自殺在位九年墓在烽上原丙辰有燕慕容廆之亂
東國歷代總目v01烽上王名相夫西川王太子在位九年
大東遺事v1百九十二年○高句麗東明王琉璃王大武神王閔中王慕本王太祖王次大王新大王故國川王山上王東川王中川王西川王烽上王美川王故國原王小獸林王故國壤王廣開土王長壽明王文咨明王安藏王安原王陽原王平原王嬰陽王榮留王寶藏王凡二
大東遺事v1烽上王名相夫西川王太子失德不君國人廢之
大東遺事v1美川王名乙弗西川王子咄固之子也初烽上王疑咄固之有異心欲殺之乙弗畏禍出遁傭作於村家人不知之及烽上失政國人以物色訪之於山野廢烽上而立之
歷代帝王紀年v01未踰年廢○古爾王肖古弟建興十二㒵兵所害年立在位五十年○責稽王古爾子晉太康十二年立在位一年爲㒵兵所害○烽上王責稽弟太康十三年遣客刺君立在位十二年○汾西王責稽子元康八年立樂浪太守遣刺客殺之在位六年○比流王仇首東
文獻攷略v20烽上王名相夫西川王太子晋武帝元康二年壬子立庚申國相倉助利弑王在位九年時民飢相食王大發國內男女修宮室助利極諫
攷事新書v1美川王名乙弗烽上王之姪元年卽晉惠帝永康元年庚申
攷事新書v1烽上王名相夫西川王太子元年卽晉惠帝元康二年壬子
朝鮮歷史v1紀元前一千一百年壬子에高句麗王이薨고太子 相夫ㅣ立니卽烽上王이라名은 相夫니 西川王의太子라在位八年이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