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자(高奴子)
[상세내용]
고노자(高奴子)
생졸년 미상. 고구려 봉상왕 때의 명신.
293년(봉상왕 2) 선비족(鮮卑族)인 모용부(慕容部)의 족장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범하자 신성(新城: 지금의 無順市 북쪽 北關山城)에서 방어하였다.
이때 북부소형(北部小兄)으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아가 모용외의 군사를 격퇴시킨 공으로 관등이 소형(小兄)에서 대형(大兄)으로 올랐으며, 식읍(食邑)으로 곡림(鵠林)을 받았다.
그뒤 296년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서천왕의 능묘를 파헤치는 등 고구려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봉상왕은 이 문제로 고심하였다. 이에 당시의 국상(國相)이었던 창조리(倉助利)가 고노자가 어질고 용맹하여 적을 능히 막을 수 있다고 하므로,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인 신성의 태수로 삼아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곳에서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고 위맹을 떨쳐 모용외가 다시는 고구려를 침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293년(봉상왕 2) 선비족(鮮卑族)인 모용부(慕容部)의 족장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범하자 신성(新城: 지금의 無順市 북쪽 北關山城)에서 방어하였다.
이때 북부소형(北部小兄)으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아가 모용외의 군사를 격퇴시킨 공으로 관등이 소형(小兄)에서 대형(大兄)으로 올랐으며, 식읍(食邑)으로 곡림(鵠林)을 받았다.
그뒤 296년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서천왕의 능묘를 파헤치는 등 고구려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봉상왕은 이 문제로 고심하였다. 이에 당시의 국상(國相)이었던 창조리(倉助利)가 고노자가 어질고 용맹하여 적을 능히 막을 수 있다고 하므로,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인 신성의 태수로 삼아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곳에서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고 위맹을 떨쳐 모용외가 다시는 고구려를 침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韓國史講座 Ⅰ―古代篇―(李基白‧李基東, 一潮閣, 1984)
韓國史講座 Ⅰ―古代篇―(李基白‧李基東, 一潮閣, 1984)
[집필자]
권덕영(權悳永)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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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