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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威德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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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525(성왕 3)
졸년598(위덕왕 45)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위덕왕(威德王)
525년(성왕 3)∼598년(위덕왕 45). 백제 제27대 왕. 재위 554∼598년. 이름은 창(昌). 성왕의 맏아들이다.

태자 때 성왕을 도와 신라에 대한 정토(征討)에 앞장섰다. 당시 성왕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북진군을 일으켜 고구려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인 백제를 배반한 신라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무력으로 한강하류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다.

이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인 소임을 한 사람이 바로 태자 이었다. 신라정토군의 선봉에 나선 은 마침내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을 비롯하여 3만 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 성왕의 전사로 태자 은 왕위에 올라 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관산성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에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정치체제는 이전의 왕권중심체제에서 점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신라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여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고구려공격을 준비함을 알고 자진하여 군도(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고구려에 대하여 첨예한 대립관계를 보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하여서도 관산성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면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제(北齊)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日本書紀
韓國史―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59)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집필자]

노중국(盧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