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무녕왕(武寧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B34B155C655B0462X0
이명(異名)사마(斯摩)
이명(異名)사마(斯麻)
이명(異名)융()
시호(諡號)무녕(武寧)
생년462(개로왕 8)
졸년523(무녕왕 23)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무녕왕(武寧王)
462년(개로왕 8)∼523년(무녕왕 23). 백제 제25대왕. 재위 501∼523년. 이름은 사마(斯摩)사마(斯麻) 또는 융(隆).

동성왕의 둘째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는 이설이 있으나 지난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하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요,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의 손에 동성왕이 쓰러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하고 있던 백가를 토벌하였다.

그의 재위연간은 백제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말갈의 침략에 대비한 시기로, 그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국력회복에 힘썼다. 즉, 501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였고, 503년 마수책(馬首栅)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개의 책(栅)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말갈과 합세하여 한성(漢城)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 고구려가불성(加弗城)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달솔 사오(沙烏) 등에 명하여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는데, 이때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유역의 어느 곳으로 짐작되고 있다.

513년과 516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어 문화계발을 돕게 하였다.

또한, 그는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여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하였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국내의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녕(武寧)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梁書
南史
日本書紀
武寧王陵發掘調查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73)
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에 대하여(李丙燾,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 11, 1972;韓國古代史硏究, 1976)

[집필자]

이기동(李基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