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왕(右渠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B0AC70C655DB108X0 |
생년 | ?(미상) |
졸년 | -108(위만우거 27/북부여: 고우루 13, 고두막한 1) |
시대 | 고조선 |
활동분야 | 왕실 > 왕 |
조부 | 위만(衛滿) |
[상세내용]
우거왕(右渠王)
미상∼서기전 108년. 고조선의 왕.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 강대해진 세력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킨 결과가 되어,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포위되면서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하였다.
주화파(主和派)는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주화파의 일부는 적군에게 투항하였고, 주화파의 한 사람인 이계상(尼谿相) 삼(參)은 서기전 108년 6월 자객을 보내어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그뒤 대신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하였으나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우거왕이 끈기 있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씨조선이 한나라와 대항할만한 금속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하기만 하였던 대외정책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 강대해진 세력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킨 결과가 되어,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포위되면서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하였다.
주화파(主和派)는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주화파의 일부는 적군에게 투항하였고, 주화파의 한 사람인 이계상(尼谿相) 삼(參)은 서기전 108년 6월 자객을 보내어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그뒤 대신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하였으나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우거왕이 끈기 있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씨조선이 한나라와 대항할만한 금속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하기만 하였던 대외정책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史記
三國志
韓國史講座 Ⅰ―古代篇―(李基白‧李基東, 一潮閣, 1982)
衛氏朝鮮興亡考(李丙燾, 서울大學校論文集―人文社會科學 4―, 195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衛滿朝鮮關係中國側史料에 대한 再檢討(金翰奎, 釜山女子大學論文集 8, 1970)
三國志
韓國史講座 Ⅰ―古代篇―(李基白‧李基東, 一潮閣, 1982)
衛氏朝鮮興亡考(李丙燾, 서울大學校論文集―人文社會科學 4―, 195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衛滿朝鮮關係中國側史料에 대한 再檢討(金翰奎, 釜山女子大學論文集 8, 1970)
[집필자]
김용선(金龍善)
대표명 | 우거왕(右渠王) |
왕명 | 우거(右渠) |
왕명 : "우거(右渠)"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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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