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취문(金就文)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DE8BB38B1509X0
자(字)문지(文之)
호(號)구암(久菴)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09(중종 4)
졸년1570(선조 3)
시대조선전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광좌(金匡佐)
저서『구암집』
공훈청백리(淸白吏)

[상세내용]

김취문(金就文)
1509년(중종 4)∼1570년(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 김광좌(金匡佐)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형 김취성(金就成)과 함께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고 문장을 잘하여 이름이 높았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거쳐, 1541년 형조‧예조의 좌랑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비안현감을 지냈다.

1544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이듬해 홍문관수찬, 1547년(명종 2) 호조‧공조의 정랑을 지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도사영천군수청송부사상주목사나주목사를 거쳐, 1565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집의교리호조참의대사간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자주 외직으로 밀려났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침탈함이 전혀 없어 성균관사성으로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또한, 경세적(經世的)인 관심도 커서 지방 수령으로 전전할 때 시정(時政)에 대한 건의사항을 왕에게 주달한 것이 문집에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구암집』 3권이 남아 있다. 처음 시호를 정간(貞簡)이라고 했다가 뒤에 문간(文簡)으로 바꾸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