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李容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A9D0DCB1854X0 |
생년 | 1854(철종 5)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관료 > 대신 |
부 | 이병로(李秉路)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용태(李容泰)
1854년(철종 5)∼미상. 조선 말기의 대신. 본관은 전주(全州).
부사 이병로(李秉路)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진사가 되고, 군수로서 188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누진하여 직각에 이르렀다.
1887년 영국‧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등 5개국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되고, 부응교를 거쳐 1891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가 되었다.
1894년 장흥부사로 재직중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서 동학군의 무마에 나서 지나친 탄압과 만행을 감행하여, 오히려 동학교도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어 봉기가 확대되자 파직당하고, 김산군에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등용되어 1899년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 1901년 주미공사가 되고, 이어 비서원경(秘書院卿)‧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 등을 거쳐 찬정(贊政)에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궁내부특진관, 이완용(李完用)친일내각의 학부대신을 역임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부사 이병로(李秉路)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진사가 되고, 군수로서 188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누진하여 직각에 이르렀다.
1887년 영국‧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등 5개국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되고, 부응교를 거쳐 1891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가 되었다.
1894년 장흥부사로 재직중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서 동학군의 무마에 나서 지나친 탄압과 만행을 감행하여, 오히려 동학교도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어 봉기가 확대되자 파직당하고, 김산군에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등용되어 1899년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 1901년 주미공사가 되고, 이어 비서원경(秘書院卿)‧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 등을 거쳐 찬정(贊政)에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궁내부특진관, 이완용(李完用)친일내각의 학부대신을 역임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高宗紀事
文品案
東學亂記錄(國史編纂委員會, 1974)
文品案
東學亂記錄(國史編纂委員會, 1974)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명 : "용태(容泰)"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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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