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제(金台濟)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D0DCC81CB1827X0 |
생년 | 1827(순조 2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상일(金商一) |

[상세내용]
김태제(金台濟)
1827년(순조 27)∼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부친은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상일(金商一)이다.
188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으로 출사(出仕)한 뒤 189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900년 정족산성사고(鼎足山城史庫)소장 『인조실록』 2책이 분실된 사건이 일어나자 겸장례(兼掌禮)로 있으면서 감독을 소홀히 한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 실록이 무사히 환수됨으로써 사면되었다.
한편, 봉상시제조로 있을 때에는 2차에 걸쳐, 사회적으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여가던 유교를 체계적으로 발흥시키기 위하여 성현의 위호(位號)를 바로잡고 경전(經典)을 교정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뒤 장례원소경‧사직서제조‧비서원승‧태의원경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상일(金商一)이다.
188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으로 출사(出仕)한 뒤 189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900년 정족산성사고(鼎足山城史庫)소장 『인조실록』 2책이 분실된 사건이 일어나자 겸장례(兼掌禮)로 있으면서 감독을 소홀히 한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 실록이 무사히 환수됨으로써 사면되었다.
한편, 봉상시제조로 있을 때에는 2차에 걸쳐, 사회적으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여가던 유교를 체계적으로 발흥시키기 위하여 성현의 위호(位號)를 바로잡고 경전(經典)을 교정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뒤 장례원소경‧사직서제조‧비서원승‧태의원경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박민영(朴敏泳)
대표명 | 김태제(金台濟) |
성명 | 김태제(金台濟)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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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