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만(鄭東晩)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B3D9B9CCB1753X0 |
자(字) | 우고(友古) |
호(號) | 졸암(拙菴) |
생년 | 1753(영조 29) |
졸년 | 1822(순조 2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계순(鄭啓淳) |

[상세내용]
정동만(鄭東晩)
1753년(영조 29)∼1822년(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고(友古), 호는 졸암(拙菴). 대사간 정계순(鄭啓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804년(순조 4)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어 경기도 고양군에 나갔으며, 그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진주목사가 되었고, 1819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혜국(惠局)의 낭(郞)이 되었으며, 1822년에는 아들 정원용(鄭元容)이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영달하였으므로 추은(推恩)의 혜택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로 취임하였다.
그뒤 곧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왕실친족간의 친목도모에 진력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804년(순조 4)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어 경기도 고양군에 나갔으며, 그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진주목사가 되었고, 1819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혜국(惠局)의 낭(郞)이 되었으며, 1822년에는 아들 정원용(鄭元容)이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영달하였으므로 추은(推恩)의 혜택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로 취임하였다.
그뒤 곧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왕실친족간의 친목도모에 진력하였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經山集
經山集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대표명 | 정동만(鄭東晩) |
명 | 동매(東浼) |
명 : "동매(東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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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