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만(南基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AE30B9CCB1730X0 |
자(字) | 백온(伯溫) |
호(號) | 묵산(黙山) |
생년 | 1730(영조 6) |
졸년 | 1796(정조 2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영양(英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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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남국규(南國珪) |
외조부 | 이정일(李廷一) |
출신지 | 영해 |
저서 | 『묵산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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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정보]
[상세내용]
남기만(南基萬)
1730년(영조 6)∼1796년(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백온(伯溫), 호는 묵산(黙山). 영해 출신.
부친은 남국규(南國珪)이며, 모친은 이정일(李廷一)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소과에 합격한 뒤, 묵산재(黙山齋)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경학에 정통하였다.
그뒤 17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고 장릉별검을 거쳐, 1786년(정조 10) 전적, 1788년 감찰을 역임하였다.
1795년 왕이 특별히 경학에 밝은 자를 찾자 영남에서 이만운(李萬運)과 함께 등정하여 이듬해 정언에 제수되었다.
그때 환곡의 폐단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수령을 잘 선택하여야 하며, 「서명(西銘)」이 임금의 도에 가장 절실한 것이니 이황(李滉)이 그것을 도표로 그려 선조에게 바친 것과 같이 가법(家法)으로 삼을 것이며, 또한 천주교를 탄압하자는 등 시폐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를 싫어하는 대신(臺臣) 이태현(李泰賢) 등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학에 밝아 뜻과 행동과 문예가 잘 조화되어 있었고, 성력도수참동계납갑지법(星曆度數參同契納甲之法)에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묵산집』이 있다.
부친은 남국규(南國珪)이며, 모친은 이정일(李廷一)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소과에 합격한 뒤, 묵산재(黙山齋)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경학에 정통하였다.
그뒤 17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고 장릉별검을 거쳐, 1786년(정조 10) 전적, 1788년 감찰을 역임하였다.
1795년 왕이 특별히 경학에 밝은 자를 찾자 영남에서 이만운(李萬運)과 함께 등정하여 이듬해 정언에 제수되었다.
그때 환곡의 폐단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수령을 잘 선택하여야 하며, 「서명(西銘)」이 임금의 도에 가장 절실한 것이니 이황(李滉)이 그것을 도표로 그려 선조에게 바친 것과 같이 가법(家法)으로 삼을 것이며, 또한 천주교를 탄압하자는 등 시폐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를 싫어하는 대신(臺臣) 이태현(李泰賢) 등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학에 밝아 뜻과 행동과 문예가 잘 조화되어 있었고, 성력도수참동계납갑지법(星曆度數參同契納甲之法)에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묵산집』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國朝榜目
黙山集
國朝榜目
黙山集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대표명 | 남기만(南基萬) |
성명 | 남기만(南基萬) |
성명 : "남기만(南基萬)"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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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