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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만(金履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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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수(仲綏)
호(號)학고(鶴皐)
생년1683(숙종 9)
졸년1758(영조 34)
시대조선중기
본관예천(醴泉)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해일(金海一)

[상세내용]

김이만(金履萬)
1683년(숙종 9)∼1758년(영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중수(仲綏), 호는 학고(鶴皐).

경주부윤 김해일(金海一)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사마증광시에 병과로 급제, 전적‧병조랑 등을 거쳐 양산군수가 되었다. 양산군수 재직 때 수재를 막기 위하여 자기의 녹봉으로 제방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칭송하여 비를 세우고, 이름을 청전제(靑田堤)라고 불렀다.

1745년 장령으로서 민생안정의 저해요인으로 풍속의 사치스러움과 수령‧감사의 탐오함을 들어, 현명한 지방관을 선임하도록 주장하여 영조의 치하를 받았다.

그뒤 정언을 거쳐 사간집의 등 청요직을 지내며, 시정(時政)의 득실을 주청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1753년 사간에 있을 때에 수령의 탐학을 막아 흉년에 백성이 유리되는 일이 없도록 주장하였다.

1756년 국가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정책에 따라, 통정대부에 올랐고 이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星湖文集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