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명(趙駿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900BA85B1677X0 |
자(字) | 신여(愼汝) |
생년 | 1677(숙종 3) |
졸년 | 1732(영조 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양(豊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태수(趙泰壽) |
조부 | 조상우(趙相愚) |
저서 | 『계방일록(桂坊日錄)』 |

[상세내용]
조준명(趙駿命)
1677년(숙종 3)∼1732년(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신여(愼汝). 우의정 조상우(趙相愚)의 손자로, 첨정 조태수(趙泰壽)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영소전참봉(永韶殿參奉)이 되고, 세자익위사시직‧호조좌랑을 거쳐 함양군수‧청풍부사‧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청주목사가 되어 피폐한 민심을 잘 다스리고 기민(飢民) 9,000여명을 구제하여 안정시켰으므로 충청감사와 어사가 포계(褒啓)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특히, 사람됨이 세심하여 소홀함이 없고, 소송사건을 공명하게 판결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글씨를 잘 써서 전서(篆書)‧주서(籒書)‧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계방일록(桂坊日錄)』이 있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영소전참봉(永韶殿參奉)이 되고, 세자익위사시직‧호조좌랑을 거쳐 함양군수‧청풍부사‧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청주목사가 되어 피폐한 민심을 잘 다스리고 기민(飢民) 9,000여명을 구제하여 안정시켰으므로 충청감사와 어사가 포계(褒啓)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특히, 사람됨이 세심하여 소홀함이 없고, 소송사건을 공명하게 판결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글씨를 잘 써서 전서(篆書)‧주서(籒書)‧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계방일록(桂坊日錄)』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東溪集
歸庵集
槿域書畵徵
東溪集
歸庵集
槿域書畵徵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대표명 | 조준명(趙駿命) |
성명 | 조준명(趙駿命) |
성명 : "조준명(趙駿命)"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