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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섭(金元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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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지화(至和)
생년1640(인조 18)
졸년1710(숙종 36)
시대조선중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하량(金廈樑)

[상세내용]

김원섭(金元燮)
1640년(인조 18)∼1710년(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지화(至和).

부친은 한성우윤 김하량(金廈樑)이다.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에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세하자 관직에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재직 동안 조성(趙䃏)의 신원(伸寃)과 오정창(吳挺昌)의 치제(致祭)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과정에서 품관(品官)과 향리(鄕吏)에 의하여 빚어지는 여러가지 민폐를 시정할 것 등, 평소에 생각한 바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장문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사은사서장관(書狀官)에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대사간으로 재임시 갑술옥사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유학(幼學) 김인(金寅) 등의 고변서(告變書)에 신천군수(信川郡守) 윤희(尹熺)와 서찰을 서로 통한 것으로 무고되었다. 결국 역모를 한 것으로 몰려 몇 차례의 국문을 받고 극변(極邊)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