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후(朴光後)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BC15AD11D6C4B1637X0 |
| 자(字) | 사술(士述) |
| 호(號) | 안촌(安村) |
| 생년 | 1637(인조 15) |
| 졸년 | 1678(숙종 4)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순천(順天)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 부 | 박천용(朴天用) |
| 모 | 남씨(南氏) |
| 조부 | 박창우(朴昌禹) |
| 처 | 홍씨(洪氏) |
| 묘소 |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 |

[상세내용]
박광후(朴光後)
1637년(인조 15)∼1678년(숙종 4).(주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
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당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에 비유하였고, 또한 “큰불이 동연(洞然)에 타지 않은 구슬이다”라고 평하였다.
이후 벼슬할 뜻을 접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기질을 세상에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우암에게 보낸 글에서 “사술(士述)이 죽으니 남주(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진다.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중회(朴重繪)이다.
| 몰년 |
| 순천박씨 돈녕공파에서 1986년에 발간한 병인보(丙寅譜)의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기록 참고. |
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당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에 비유하였고, 또한 “큰불이 동연(洞然)에 타지 않은 구슬이다”라고 평하였다.
이후 벼슬할 뜻을 접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기질을 세상에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우암에게 보낸 글에서 “사술(士述)이 죽으니 남주(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진다.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중회(朴重繪)이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司馬榜目
光州邑誌
司馬榜目
光州邑誌
[집필자]
이미선
명 : "광후(光後)"에 대한 용례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