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李鼎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815D0DCB1595X0 |
자(字) | 공보(公寶) |
호(號) | 야은(野隱) |
생년 | 1595(선조 28)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영천(永川)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부 | 이승선(李承先) |
조부 | 이몽득(李夢得)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정태(李鼎泰)
1595년(선조 28)∼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공보(公寶), 호는 야은(野隱).
참봉(參奉) 이몽득(李夢得)의 손자이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승선(李承先)의 아들이다. 처부는 영일정씨(迎日鄭氏) 정진명(鄭振溟)이다.
일찍이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으로 학문이 박식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33년(인조 11) 별제(別提)를 제수 받았으나 재임 중에 어버이의 임종을 보지 못하여 이후 스스로 호를 ‘야은(野隱)’이라 칭하고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재종형(再從兄) 이정신(李鼎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이 당시 심정을 한편의 시로 표현했는데 그 내용이 『존양록(尊攘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바다를 밟은 높은 자취, 누가 다시 이을까! 흰머리에 구차한 삶이 부끄럽네.’ 후에 대치사(大峙祠)에 배향되었다.
참봉(參奉) 이몽득(李夢得)의 손자이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승선(李承先)의 아들이다. 처부는 영일정씨(迎日鄭氏) 정진명(鄭振溟)이다.
일찍이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으로 학문이 박식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33년(인조 11) 별제(別提)를 제수 받았으나 재임 중에 어버이의 임종을 보지 못하여 이후 스스로 호를 ‘야은(野隱)’이라 칭하고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재종형(再從兄) 이정신(李鼎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이 당시 심정을 한편의 시로 표현했는데 그 내용이 『존양록(尊攘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바다를 밟은 높은 자취, 누가 다시 이을까! 흰머리에 구차한 삶이 부끄럽네.’ 후에 대치사(大峙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光州邑誌
司馬榜目
全羅南道誌
司馬榜目
全羅南道誌
[집필자]
이미선
대표명 | 이정태(李鼎泰) |
호 | 야은(野隱) |
호 : "야은(野隱)"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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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